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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3 초보의 죄를 사하라.
초보의 죄를 사하라.
일주일 전 정도 전에, 최근 말썽을 부리던 휴대폰을 나름 복잡한 사연과 과정을 거쳐 AS를 접수하였다. AS 분야에서 악명이 높은 A사의 제품을 쓰는지라, 일주일 정도는 임대폰을 사용하였고 오늘에서야 내가 원래 사용하던 제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솔직히 예상보다는 조금 빨랐다.)
오늘 물건을 찾으러 가니, 물품 상태 확인 및 수령 절차를 사복 차림의 뭔가 어설퍼 보이는 청년이 도와준다. 서비스센터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뒤에서 이런 저런 조언을 하는 것을 보니, 새로 채용 예정인 직원이거나, 인턴십 과정 중인 듯 했다.
어차피 수리가 완료된 상태에서 물건을 수령하는 과정이므로 업무 숙련도가 무슨 큰 상관이 있을 것이며, 뒤에서 지켜보고 조언하는 선임이 있으므로 전혀 염려할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취직 등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내기 어려운 현 시대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새내기의 모습에 격려를 하고 싶고 흐뭇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의 내심과는 무관하게, 그 동안 내가 임대했던 휴대폰의 상태를 살피고 수리해온 기존 폰에 유심 칩을 옮기고 하는 과정에서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많은 선배님들 앞에 가소로운 이야기지만, 의사면허를 획득한지 9년 정도 되어가다 보니 솔직하게 말해서 첫 환자의 얼굴이나 상황이 기억 나진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중심정맥 삽관이나 기도 삽관 시술을 했을 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한다. 어쩌면 손을 저 정도로 떨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나름 긴장을 많이 했을 것이다. 뒤에서 선임 전공의 선생님이나 먼저 그 시술을 경험한 동기들이 지켜보아 주었겠지만, 그래도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시기의 나의 시술을 감내해준 환자 분들과 보호자 분들 덕에 나는 나름대로 각종 술기에 나름 자부심이 넘치는(?) 건방진 전공의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사회적 분위기를 보았을 때, 이런 새내기에게 어떠한 것을 맡기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위 ‘손님은 왕’이라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말을 우리의 생활 전반에 적용하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대우에 대해서 (적정 대가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라도) 모두 숙련된 사람에게 받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배정된 비교적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 깔보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욱 주눅들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마저 하기 마련이다.
(정상적인 수련 시스템 속에서) 선임은 새내기에게 터무니없는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서 심폐정지가 발생한 환자를 상대로 첫 시술을 해보라고 중심정맥 삽관 키트를 쥐어 주거나, 갓 의국에 들어온 1년차 전공의에게 첫 환자로 중환자실 환자를 맡기지 않는다. 이 것은 사회 어떤 분야에서나 마찬가지인 당연한 일이다. 비행 면허를 첫 취득한 사람에게 대형 여객기의 기장을 맡기지 않으며, 갓 임용된 판사에게 대법원 판결을 맡기지 않는다. 갓 임관한 소위에게 사단 병력을 맡기지 않는다. 그들 역시 비교적 쉬우면서 그 책임이 덜한 임무에서 시작하여, 감당할 역량이 되었을 때 한 단계 위의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기자 출신으로, 대통령 연설 담당 비서관을 역임했던 고도원 선생님의 ‘잠깐 멈춤’이라는 책에 아기가 걸음마를 익히기 까지 넘어지는 횟수가 평균 2,000번 정도라는 내용이 있다. 그 과정 동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지 지켜보는 부모가 있듯이, 전공의가 전문의가 되기 까지를 지켜보는 담당 교수와 선임 전공의가 있고 대학을 포함한 수련병원의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첫 걸음마의 시도에서 주저 앉거나 넘어질 때 타박을 주고, 꾸짖고, 그 이상의 문책을 한다면 어쩌면 아기들은 스스로 걷는 시도를 포기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내 가족의 맹장 수술을 외과 전공의들에게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 전공의들 중에서 (추후 나에게 발생할 지도 모르는) 암 절제술이나 장기 이식 수술 등을 할 미래의 대가(大家)가 나오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느 덧 3월, 사회 전반에 새내기들이 활동을 시작할 시기다. 농담처럼 3-4월에는 대학병원 가지 말라고 말하지만,
어디 병이라는 놈이 내 의도대로, 정해진 약속대로 움직이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병원은 물론 사회 어떤 분야에서나 새내기를 만나게 되신다면, 조금만 더 인내해주시고 약간의 격려 말씀을 보태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분명히 우리 세대, 혹은 우리 다음 세대에서 그들의 성장으로 인한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초짜 시절은 있다.